온산병 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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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산병 사태
목록구분 |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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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별번호 | E00002 |
사건구분 | 사건대응 |
사건시작연도 | 1978 |
사건종료연도 | 1987 |
사건의 경과와 주요내용 | 온산공단은 1974년에 석유화학, 비철금속 등 복합공업단지로 조성되었다. 공업단지 개발을 위한 종합계획 없이 개별공장이 세워져 전체 1만 4천여 명 주민 중 1만 2천여 명이 공단에 포위된 채 살아가게 되었다. 1982년부터 어업피해와 집단적인 신경통, 피부병 증세가 나타나면서, 1985년 한국공해문제연구소가 기자회견을 열고 카드뮴 오염으로 인한 이타이이타이병 등 공해병의 가능성을 제기했다. 그러자 환경청은 일주일 동안 역학조사를 진행하고 '공해병의 가능성을 전혀 발견할 수 없었다'고 했다. 정부는 공해병을 인정하지 않았지만, 모순되게도 총 1198억 원의 예산을 들여 공단 내 3만 7610명 전원을 이주시키기로 해, 끝내 집단적 발병의 원인을 찾아내지 못했다. |
사건대응의 주요내용 | 온산에서 나타난 집단적인 질병을 공해병으로 보고 특이한 증상을 온산병이라 부른다. 한국공해문제연구소는 1984년부터 온산공단의 공해 문제를 정기간행물인 공해연구에서 다루기 시작했고, 1985년 1월, 언론의 도움을 받아 온산병 문제를 사회에 알렸다. 이후 환경청의 조사단이 아무런 문제가 없다는 결론을 내리자 이에 대한 반박 입장을 내기도 했다. 공해 연구회는 전문적인 연구 분석 작업을 주로 했는데 피해자를 15000~2000명으로 추산했다. 반공해운동 협의회가 주민 청년 조직과의 직접 접촉을 맡았다. 1984년 7월에, 이 세 조직은 공해문제연구소의 이름으로 온산병 실태 조사를 위해 현지 조사를 실시했고, 국내에서 조사자가 마땅치 않자 온산공해병대책위원회와 함께 일본 공해병의 대가인 하라다 마사스미 교수를 초청해 정부의 역학조사 실시를 압박했다. |
관리번호 | 1134 |